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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와 아몬드 학명 뒤바뀐 운명

lcs20230 2020. 3. 16. 13:57

무릉 군에 고기 잡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시내를 따라가다가 길을 잃어버렸다. 문득 복숭아 꽃이 활짝 핀 숲에 도달했는데, 좁은 물가에 수백 보 길이로 다른 나무는 하나도 없이 신선한 향초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고, 꽃잎이 분분히 떨어졌다.
- 도연명,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요즘은 하우스 재배에 수입산까지 가세해 사시사철 다양한 과일이 넘쳐나지만 여전히 필자에게 최고의 과일은 여름 한 철 맛볼 수 있는 복숭아다. 무더위가 한창일 때 잘 익은 복숭아 과육을 한 입 그득 머금을 때 입안 가득 채우는 맛과 향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동양의 이상향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한자 복숭아 도(桃)에서 조(兆)는 옛날 중국에서 거북 등껍질로 점을 칠 때 갈라진 금을 본떠 만든 글자라고 한다. 씨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나무라서 ‘도(桃)’라는 한자어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둘로 쪼개지는 건 엄밀히 말하면 씨가 아니라 내과피이다. 복숭아 열매는 바깥쪽에서부터 안쪽으로 외과피(껍질), 중과피(과육). 내과피(심)로 이뤄져 있고 내과피 안에 인(kernel)이라고도 부르는 씨가 들어있다. 그런데 둘로 쉽게 쪼개지는 내과피가 문제다.


복숭아씨에는 독이 들어있지만

인내심을 갖고 껍질을 다 벗겨낸 뒤 복숭아를 쥐고 있는 손 위로 과즙을 줄줄 흘려가며 과육을 게걸스럽게 먹다 보면 힘을 받아서인지 어느 순간 내과피가 쪼개지면서 안의 투명한 점액 같은 게 흘러나올 뿐 아니라 독특하지만 유쾌하지는 않은 냄새까지 풍긴다. 아까운 마음에 내과피 바깥에 붙어있는 과육을 먹는 데까지는 먹어보지만 이미 입맛은 망친 상태다.

쪼개진 내과피 안에는 아몬드처럼 생긴 씨가 들어있는데 아몬드와는 달리 독특한 냄새가 강해 먹어볼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물론 먹어서도 안 되는데 여기에는 아미그달린(amygdalin)이라는 독성 물질이 다량 들어있기 때문이다. 독특한 냄새는 아미그달린의 분해산물인 벤즈알데하이드(benzaldehyde)에서 온다.

열매의 내과피 안, 특히 씨에 아미그달린이 고농도로 들어있는 건 벚나무속(屬)(Prunus) 식물의 특성이다. 복숭아나무(학명 Prunus persica)뿐 아니라 자두나무(P. salicina), 매실(매화)나무(P. mume), 살구나무(P. armeniaca), 벚나무(버찌(cherry))(P. serrulata), 앵두나무(P. tomentosa)의 내과피 안이 다 그렇다. 다만 복숭아를 빼면 다들 내과피가 단단히 붙어있어 쪼개질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매실청을 담글 때 매실을 통째로 써도 되는 이유다.

 

위의 벚나무속 식물들은 열매에서 중과피(과육)를 먹지만 특이하게 씨(인)를 먹는 종류가 있다. 바로 아몬드다. 아몬드는 분류학상으로 벚나무속 식물들 가운데서도 복숭아나무와 가깝지만(그래서 이들을 복숭아아속(亞屬)(Amygdalus)으로 따로 놓기도 한다) 우리가 먹는 부위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아몬드(씨)를 먹을 때 고소할 뿐 전혀 쓴맛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그리고 아몬드를 잔뜩 먹어도 독에 중독되지 않는 걸까(다만 알레르기 반응이 생길 수는 있다).

 

전사인자 아미노산 하나가 바뀌자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6월 14일자에는 아몬드 게놈을 해독해 그 비밀을 밝힌 연구결과가 실렸다. 스페인과 덴마크, 이탤리의 공동연구자들은 아몬드의 게놈을 해독해 참조게놈인 복숭아 게놈과 비교한 결과 아몬드 게놈에서 아미그달린 생합성에 관련한 효소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치는 전사인자에서 돌변변이를 찾아냈다. 그 결과 효소 유전자가 제대로 발현하지 못해 아미그달린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야생 아몬드는 복숭아 씨와 마찬가지로 아미그달린이 포함돼 있다. 이를 ‘비터 아몬드(bitter almond)’라고 부르는 이유다. 우리가 먹는 재배종 아몬드에는 아미그달린이 거의 들어있지 않고 따라서 ‘스위트 아몬드’라고 부른다. 아몬드는 늦어도 4000년 전 오늘날 이란 지역에서 작물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쓴맛이 나지 않는 아몬드가 열리는 돌연변이 야생 나무를 우연히 발견해 재배한 것으로 보인다.

과학자들은 아몬드에서 아미그달린 생합성 경로를 규명했다. 그 결과 씨의 껍질에서 아미노산인 페닐알라닌(phenylalanine)을 출발물질로 해서 네 단계를 거쳐 아미그달린이 만들어진 뒤 떡잎에 축적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 모두 여섯 가지 효소가 관여한다.

두 유형의 아몬드에서 효소의 발현량을 비교한 결과 생합성 과정의 첫 단계인 페닐알라닌을 페닐아세트알독심(phenylacetaldoxime)으로 바꿔주는 효소인 PdCYP79D16에서 큰 차이가 났다. 반면 효소 유전자 자체는 변이가 없었다. 스위트 아몬드의 PdCYP79D16는 멀쩡하지만 거의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생합성 과정이 출발부터 삐걱거린다는 말이다.

따라서 효소 PdCYP79D16의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전자인자가 열쇠를 쥐고 있을 가능성이 큰데 지금까지 그 실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게놈을 해독해 분석한 결과 bHLH2가 찾고 있던 전사인자이고 스위트 아몬드에서 bHLH2의 아미노산 하나가 바뀌면서 기능을 잃어 표적인 PdCYP79D16 유전자의 발현이 크게 떨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346번째 아미노산이 류신에서 페닐알라닌으로 바뀌면서(L346F) 전사인자 bHLH2가 PdCYP79D16 유전자의 표적 DNA 영역에 달라붙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을 보면 ‘과연 분자 생물학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사실 아미그달린 자체가 독성분자는 아니다. 벚나무속 식물의 씨에는 아미그달린과 함께 이를 분해하는 효소인 베타-글루코시다제(beta-glucosidase)가 공간적으로 분리돼 축적돼 있다. 그런데 씨를 입에 넣어 씹으면 떡잎이 으깨지면서 둘이 섞여 효소가 아미그달린을 두 분자로 분해하고 이 가운데 하나가 최종적으로 벤즈알데하이드와 시안화수소(hydrogen cyanide)로 분해된다. 온전한 씨에서도 이 반응이 약간 일어나기 때문에 벤즈알데하이드 냄새가 느껴지는 것이다.

시안화수소는 강력한 독소로 치사량이 몸무게 1㎏에 0.6~1.5㎎ 수준이다. 만일 스위트 아몬드가 아니라 비터 아몬드를 먹을 경우 어른은 50알, 아이들은 5~10알만 먹어도 사망할 수 있다. 물론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비터 아몬드를 볼 기회가 없을 것이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복숭아와 아몬드의 학명을 보면 잘못된 작명일 뿐 아니라 둘이 바뀌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마저 든다. 먼저 복숭아 학명(Prunus persica)의 ‘persica’는 이 식물의 원산지가 페르시아, 오늘날 이란 지역임을 반영한 결과다. 로마 시대에 페르시아에서 복숭아를 들여온 유럽인들은 페르시아가 원산지라고 생각하고 이런 학명을 지었다.

그러나 이란 지역에는 야생 복숭아가 없고 훗날 알아보니 중국 서북부 지역이 원산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원산지를 나타내는 학명을 지을 경우 Prunus chinensis여야 한다.

한편 아몬드의 학명(Prunus dulcis)에서 ‘dulcis’는 달콤하다는 뜻이다. 스위트 아몬드에만 해당된다. 작명을 할 때 씨의 쓴맛이 없는 게 다른 벚나무속 식물과 가장 큰 차이라는 걸 강조하다 보니 비터 아몬드의 존재를 깜빡 한 것일까. 물론 비터 아몬드의 학명도 같다


그런데 아몬드의 원산지는 이란 지역이다. 따라서 원산지를 부각해 학명을 짓는다면 복숭아의 학명(Prunus persica)이 될 것이다. 복숭아 과육은 꽤 달콤하기 때문에 맛에 주안점을 두고 학명을 짓는다면 아몬드의 학명(Prunus dulcis)이 오히려 안성마춤일 것이다. 필자가 둘의 학명이 바뀌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말한 이유다. 물론 학명은 일단 정해지면 바꿀 수 없다.

맛과 건강 모두 충족

아무튼 bHLH2 유전자의 돌연변이 덕분에 인류는 아몬드를 즐겨 먹고 있다. 아몬드의 연간 생산량은 220만 톤으로 이 가운데 100만 톤이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나온다. 아몬드는 탄수화물 22%, 단백질이 21%, 지방이 50%이고 미량 영양소도 많이 들어있다. 특히 비타민B군과 미네랄이 풍부하다. 탄수화물도 주로 식이섬유다(13%). 평소 인스턴트식품이나 가공식품을 즐겨 먹는다면 출출할 때 간식으로 과자 대신 아몬드를 한 움큼 집어 먹는 게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복숭아 역시 맛과 영양에서 손색이 없는 과일이다. 복숭아의 연간 생산량은 2500만 톤으로 이 가운데 1440만 톤이 원산지인 중국에서 생산된다. 파이토케미컬 가운데 폴리페놀이 풍부하고 밝혀진 향기 성분만 110가지나 된다. 필자는 과거 화장품 회사를 다닐 때 복숭아 향을 모방한 향기를 많이 맡아봤지만 다들 천연 향에는 명함도 못 내미는 수준이었다. 잘 익은 진짜 복숭아만이 줄 수 있는 향기라는 말이다.

어렸을 때만 해도 아몬드는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사시사철 캘리포니아산 아몬드를 먹을 수 있게 됐다. 반면 복숭아는 그때나 지금이나 생과는 무더위가 한창일 때 잠깐 맛볼 수 있다.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수시로 아몬드를 집어 먹었는데 그럴수록 복숭아 생각이 더 간절했다.

머지않아 복숭아가 나오기 시작하면 잘 익은 백도(白桃)를 실컷 먹어야겠다. 물론 나름 개성이 있는 황도(黃桃)도 잊지 않고 맛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