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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이제 밧데리 경쟁시대다.

lcs20230 2020. 3. 16. 22:10

스티브 잡스하면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떠오른다. 그렇지만 2008년 발표한 노트북 ‘맥북에어’의 반향도 상당했다. 무게가 2kg를 안 넘으면 가벼운 노트북이었던 시절(13.3인치 기준) 잡스가 무게 1.3kg에 불과한 세계에서 가장 얇은 노트북을 서류봉투에서 꺼내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결국 필자는 2011년 맥북에어를 사서 지금까지 쓰고 있다.

스마트폰에서는 삼성이 나타났듯이(물론 베꼈을 뿐이라며 평가절하하기도 하지만) 노트북에서는 엘지가 2014년 ‘그램’이라는 노트북을 내놓으며 맥북에어의 색이 바랬다(물론 그래봐야 아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1kg도 안 되는 그램의 등장으로 이제 무게단위가 바뀌어야 가벼운 노트북으로 쳐주는 시대가 됐다. 엘지는 2015년 14인치 그램을 선보였고 작년에는 15.6인치 그램을 출시해 놀라움을 줬다.


작년 들어 배터리 효율이 급격이 떨어져 카페에서 작업하다 곤란한 일을 몇 번 겪었다. 이제 노트북을 바꿀 때가 됐다 싶었지만 몇 달 지나면 2017년이라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인터넷 검색과 문서작업이 전부인 필자로서는 굳이 이럴 필요가 없겠지만).


‘다만 100g이라도 줄겠지...’ 이 정도 기대를 했던 필자는 2017년형 그램 스펙을 보고 깜짝 놀랐다. 14인치의 배터리지속시간이 기존 10.5시간에서 무려 23시간으로 두 배 이상 길어진 데다 여전히 g단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물론 2년이면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개선으로 전력소비를 줄일 수 있겠지만 13시간이면 모를까 23시간은 배터리 자체를 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 이 제품의 배터리 용량은 기존의 1.7배나 된다고 한다.

노트북 몸체를 열어보면 배터리가 3분의 1을 차지한다. 여기서 70%가 더 커진다면 전체 공간을 늘리지 않고는 배치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회사의 설명에 따르면 신소재인 탄소나노튜브로 재설계된 초고밀도 배터리를 적용했기에 이런 혁신이 가능했다고 한다. 즉 그 정도로 공간이 더 필요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게다가 1시간만 충전해도 10시간은 쓸 수 있다고 한다. 아무튼 필자로서는 무게가 100g 주는 것보다 사용시간이 두 배 느는 게 훨씬 낫다. 그런데 탄소나노튜브가 어떻게 이처럼 배터리의 성능을 향상시킨 걸까.

 


 기대에는 못 미치지만 여기저기 쓰여


지금은 그래핀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지만 한때 탄소나노튜브(carbon nanotube, 줄여서 CNT)는 나노과학기술을 상징하는 물질이었다. 1985년 탄소원자 60개로 이루어진 축구공 분자 풀러렌이 발견되고 6년이 지난 1991년 발견된 탄소나노튜브(풀러렌을 길쭉하게 늘린 구조로 죽부인처럼 생겼다)는 그래핀이 보고된 2004년 무렵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1998년 탄소나노튜브로 트랜지스터를 만드는데 성공했고 2007년 CNT트랜지스터로 라디오를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막상 탄소나노튜브를 상용화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전자소자로 쓰려면 일정한 크기로 만들어야 할 뿐 아니라 나노수준의 정교한 패턴대로 칩에 배치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CNT는 그렇게 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만 놓고 보면 CNT트랜지스터가 실리콘반도체트랜지스터보다 효율이 높고 전기적 특성이 좋지만 손톱만 한 면적에 트랜지스터 수십 억 개가 배치돼야 하는 반도체 칩은 다른 차원의 얘기다. 따라서 집적도는 높지 않지만 실리콘반도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특수한 분야에 한해 개발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즉 정교한 구조가 개입되는 하이테크(high tech) 쪽은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반면 탄소나노튜브가 첨가제로 쓰여 소재의 강도를 높이거나 전기를 잘 통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로테크(low tech) 쪽에서는 상용화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 탄소나노튜브를 만드는 비용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탄소나노튜브는 같은 무게의 강철보다 인장강도(양쪽에서 당길 때 버티는 힘)가 300배나 되고 탄성도 훨씬 커 길이방향으로 16%까지 늘어날 수 있다. 전기는 구리보다도 잘 통하고 열도 빨리 분산시킨다.


따라서 요즘 고가제품에는 탄소나노튜브가 포함된 소재가 많이 쓰인다. 예를 들어 탄소나노튜브를 함유한 플라스틱으로 자동차 연료필터를 만들면 전기전도도가 커져 정전기로 인한 스파크가 일어날 염려가 없다. 탄소나노튜브를 함유한 가볍고 강한 소재를 쓴 자전거나 테니스 라켓, 골프채도 나와 있다. 이처럼 쓰임새가 넓어지면서 연간 탄소나노튜브 생산량이 늘고 있다.

 이미 쓰이고는 있지만...


그런데 최근 수년 사이 배터리 분야도 탄소나노튜브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의 핵심기술이 상향평준화되면서 이제 배터리의 성능 같은 사용편의성 측면이 제품의 성패에 주요변수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반도체칩에 비하면 배터리는 한참 아래 기술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무게는 줄이고 사용시간은 늘리고 안전성을 유지하며 수명을 길게, 즉 배터리 효율이 떨어지는 속도를 최대한 늦추게 하는 등 네 마리 다섯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야하는 게 보통일이 아니다. 지난해 갤럭시노트7 배터리 게이트를 지켜보면서 다를 실감했을 것이다.  


요즘 배터리로 가장 각광받는 건 1991년 일본 소니가 처음 선보인 리튬이온배터리다. 참고로 리튬폴리머배터리는 전해질을 고분자 젤로 만들어 안전성을 높인 변형으로 원리는 같다. 배터리는 양극, 음극, 전해질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는데 음극에 전자(전기에너지)가 잔뜩 담겨 있다(리튬원자의 형태로). 제품을 통해 양극과 음극이 연결되면 음극의 전자가 양극으로 이동하면서(전류가 흐르면서) 제품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이때 음극의 리튬은 이온으로 떨어져 나가 전해질을 통해 양극으로 이동해 전자를 받아 다시 원자로 바뀐다.

두 극 사이에 전자가 다 이동하면 배터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배터리를 플러그에 연결하면 외부의 더 강력한 전압의 힘으로 양극의 전자를 억지로 음극으로 보내 다시 원상태로 만든다. 즉 충전이 된다. 이번엔 양극의 리튬이 이온으로 떨어져 나가 전해질을 통해 음극으로 이동해 전자를 받아 다시 원자로 바뀐다. 이렇게 방전과 충전 과정에서 리튬이온이 음극과 양극 사이를 오가므로 ‘리튬이온’배터리다.


물론 사용량에 따라 다르지만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의 경우 보통 하루나 이틀에 충전과 방전 사이클을 반복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충전 효율이 떨어진다. 필자 노트북도 처음엔 충전하면 한 열 시간은 썼는데 6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세 시간도 안 되는 것 같다. 결국 배터리 사용시간과 수명을 늘리려면 양극과 음극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리튬이온배터리에서 널리 쓰이는 음극 소재는 흑연이다. 패스츄리처럼 그래핀이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는 흑연은 탄소로만 이뤄진 물질로 여기에 리튬이 결합돼 있는 상태(LiC6)는 전극전위가 낮다. 즉 전자를 잘 내어준다(산화되기 쉽다). 한편 양극 소재로는 리튬코발트산화물(LiCoO2) 등 전극전위가 높은, 즉 전자를 더 좋아하는 물질이 쓰인다. 충전된 배터리는 음극이 환원된 상태이고 양극이 산화된 상태이므로, 제품의 전원을 켜 둘의 회로가 연결돼 전자의 길이 열리면 음극이 산화되고 양극이 환원되는 반응이 일어난다.


결국 배터리의 용량은 한 번 충전에 얼마나 많은 전자를 음극에 잡아둘 수 있느냐의 문제이고 리튬이온배터리의 경우 전극에 포획된 리튬이온의 양에 비례한다. 충전시간은 이렇게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따라서 똑 같은 소재로 만든 전극이라도 그 표면적이나 표면 구조에 따라 용량과 충전시간이 달라질 수 있다.

흥미롭게도 전극을 만들 때 탄소나노튜브를 섞어주면 이런 측면에서 상당한 효과가 있다. CNT 덕분에 표면적이 넓어지고 전기전도도가 커져 리튬이온이 빨리 자리를 뜨거나 자리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전극의 강도도 커져 충전, 방전 사이클을 반복할 때 생기는 스트레스(열, 변형 등)에 더 잘 견딜 수 있다. 즉 배터리 수명이 늘어난다. 따라서 고가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용 배터리에는 이미 CNT가 첨가물로 쓰이고 있다. 아마도 기존 그램 노트북의 배터리에도 CNT가 들어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단순히 섞어주는 로텍 차원이라 CNT의 장점을 충분히 살리지는 못한다.

 


 로텍에서 하이텍으로


따라서 LG가 2017년형 그램에 ‘탄소나노튜브로 재설계된 배터리’를 탑재했다고 언급한 건 단순한 첨가물로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 나노구조를 통제해 CNT의 잠재력을 좀 더 살린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그 이상의 언급이 없어 더 이상 얘기를 진행할 수가 없다. 아쉬운 마음에 로텍에서 하이텍으로 옮겨가고 있는 CNT배터리의 연구결과 하나를 소개한다.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 2016년 7월 13일자에는 몰리브덴황화물(MoS2)과 CNT로 이루어진 나노구조 음극을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싱가포르 난양이공대 연구팀의 논문이 실렸다. 몰리브덴황화물 음극은 흑연 음극에 비해 용량이 세 배나 되지만 구조가 불안정해 수명이 짧고 충전속도도 느리다.


연구팀은 교묘한 화학반응을 통해 CNT와 MoS2로 이뤄진 이중 원통 나노구조물을 만들었다. 먼저 CNT를 폴리아크릴로니트릴(PAN)나노섬유로 코팅한 뒤 그 표면에 MoS2 층을 만든다. 그 뒤 PAN섬유를 녹여내면 안은 탄소나노튜브, 밖은 MoS2튜브로 이뤄진 나노구조물이 완성된다.

 

이렇게 만든 구조물을 음극으로 쓴 리튬이온배터리는 기존 MoS2 음극에 비해 리튬이온이 달라붙고(충전) 떨어지는(방전) 속도가 훨씬 빨랐고 충전과 방전을 1000회 반복해도 구조가 유지됐다. 안에 있는 CNT가 전자를 빨리 운반하고 MoS2튜브 안팎으로 리튬이온이 달라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조비용 등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차세대 리튬이온배터리로 시장에 나올지도 모르겠다.   


한참 글을 쓰다 보니 ‘배터리 수명이 다 됐으면 배터리를 바꾸면 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검색해보니 정품으로 바꿔도 비용이 새 노트북을 사는 것과 비교가 안 된다. 배터리만 바꾸면 지금 쓰고 있는 노트북도 필자에겐 과잉스펙이다. 요즘 ‘비우는 삶’이 화두라는데 괜히 배터리를 글감으로 삼았다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채우는 삶’의 욕망을 확인한 건 같아 찜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