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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조국 이스라엘로부터 이 제안을 받고 나는 깊은 감동을 느낌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에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줄곧 객관적인 문제만을 다루어 왔습니다. 때문에 사람을 적절히 다루고 공적인 직무를 수행해 나갈 타고난 재능과 경험이 모두 부족합니다.”
1952년 73세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신생국 이스라엘의 2대 대통령이 되어 달라는 제안에 대한 답신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사물의 관계에 천착한 과학자로서 사람 사이의 얽히고설킨 정치와 행정을 이끈다는 건 능력 밖이라는 고백이다. 이스라엘 대통령 자리가 공석이 된 건 초대 대통령 하임 바이츠만이 재임 3년 만에 78세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이츠만 역시 과학자였다. 물론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과학자는 아니었지만 100여 건의 특허를 낸 대단한 과학자였다. 더 놀라운 건 바이츠만은 과학자 생활을 접고 정치를 시작한 게 아니라 오랫동안 투잡을 뛰었다는 사실이다.
● 1차 세계대전에서 큰 공헌해
1874년 당시 러시아제국(현재는 벨라루스)의 핀스크 근처 모텔 마을에서 유태계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난 바이츠만은 어려서부터 유태인에 대한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과학에 재능이 있었음에도 러시아에서는 대학에 진학하기 어렵게 되자 1892년 열여덟에 독일 다름슈타트공대로 유학을 떠났고 그 뒤 다시는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았다.
2년 뒤 베를린공대로 옮겨 학부를 마쳤고 1897년 스위스 프라이부르그대로 옮겨 1899년 유기화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01년 제네바대에서 강사로 임명됐고 1904년 영국 맨체스터대에서 선임강사 자리를 얻었다. 1910년 영국시민권을 얻은 뒤 1934년까지 30년 동안 맨체스터에서 살았다.
바이츠만은 스위스 유학시절부터 시온주의 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시온주의란 유럽 각지에 퍼져 있는 유태인들이 조상의 땅인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조국을 건설하려는 목적을 실현하려는 민족운동다. 헝가리 태생의 저널리스트 테오도르 헤르츨이 주도해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세계시온주의자기구를 설립했다. 바이츠만은 이듬해 열린 2회 총회부터 죽 참석했다.
바이츠만이 영국에 머물면서 낸 100여 건의 특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건 1915년 발견한 박테리아로 옥수수 전분 같은 탄수화물을 발효시켜 아세톤과 부탄올 같은 유기용매를 얻는 방법이다. 이해에 시범공장이 세워져 대량생산 가능성을 확인했고 이듬해부터 영국 각지의 증류소를 개량해 대량생산에 들어갔다.
이처럼 산업화가 빨리 진행된 건 그만큼 다급했기 때문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뒤 아세톤의 수급에 빨간불이 들어온 상황에서 영국정부가 바이츠만의 연구를 알게 된 것이다. 아세톤은 코다이트라는 폭약을 제조하는데 꼭 필요한 용매였다. 영국은 바이츠만이 개발한 발효공정으로 전쟁 기간 동안 아세톤 3만t을 만들 수 있었고 전쟁의 승리에 큰 보탬이 됐다.
이때 나오는 산물은 대략 아세톤이 3, 부탄올이 6, 에탄올이 1의 비율이었고 따라서 각 화합물의 약자를 써 이 공정을 ‘ABE 발효’라고 부른다. 양으로 따지면 BAE 발효라고 불러야겠지만 당시 중요한 건 아세톤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고 1920년 발효공정은 CSC라는 회사로 넘어갔고(물론 바이츠만은 로열티를 받았다) 1964년까지 미국과 영국의 여러 공장에서 생산됐다. 그러나 그 뒤 공장들이 하나 둘 문을 닫았고 1983년 남아공의 마지막 발효공장이 폐쇄되면서 ABE발효산업은 종말을 고했다. 그 이유는 가격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석유화학산업이 발달하면서 석유에서 부탄올과 아세톤을 훨씬 싸게 만들 수 있었다.
아무튼 바이츠만은 ABE 발효 공정을 개발한 덕분에 영국정계에 든든한 지원군을 두게 됐고 결국 시온주의 운동이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열매를 맺었다. 이 과정에서 바이츠만은 1920~31, 1935~46년 시온주의기구 의장을 지냈고 1949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우리가 흔히 영어식 발음으로 이스라엘 와이즈만연구소라고 부르는 바이츠만과학연구소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 대사공학으로 생산성 높여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힌 ABE 발효 공정이 21세기 들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석유의 고갈이 시간문제이고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온난화가 이슈가 되면서 지속가능한 친환경 원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아세톤이 아니라 부탄올이 주인공이다. 부탄올은 용매로도 쓸모가 많지만 휘발유를 대체할 수 있는 뛰어난 연료이기 때문이다.
물론 바이오연료는 이미 거대한 산업이 됐다. 브라질 같은 곳은 바이오에탄올이 휘발유를 대체했다. 바이오디젤 역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나 연료로서는 바이오부탄올(물론 석유에서 만든 부탄올과 화학적으로는 동일하다)이 한 수 위이다. 바이오부탄올은 단위 무게 당 낼 수 있는 에너지가 가장 많고 휘발유와 어떤 비율로도 섞이면서도 물은 좋아하지 않는다. 반면 에탄올은 물을 빨아들이기 때문에 부식의 위험성이 있다. 또 부탄올은 물과 섞이지 않기 때문에 발효 뒤 분리하기 쉬운 반면 에탄올은 증류를 통해 분리해야 하므로 에너지가 추가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왜 브라질은 부탄올 대신 에탄올을 선택했을까. 수천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효모를 이용한 에탄올발효(양조와 본질적으로 같은 과정이다)가 훨씬 쉽고 수율이 높기 때문이다. 반면 부탄올은 클로스트리디움 아세토부틸리쿰(Clostridium acetobutylicum)이라는 박테리아가 만드는데 반응조건이 까다롭고(산소를 싫어한다) 수율이 낮다. 따라서 석유계 부탄올이나 바이오에탄올 같은 기존 주자들과 경쟁하려면 이 박테리아가 바뀌어야 한다.
2000년대 들어 각국의 과학자들은 ‘대사공학(metabolic engineering)’이라는 생명공학기술을 써서 다양한 측면에서 클로스트리디움 아세토부틸리쿰을 본격적으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즉 녹말의 포도당뿐 아니라 바이오디젤을 만들 때 나오는 부산물인 글리세롤을 먹게 한다든가 심지어 목재의 셀룰로오스를 소화할 수 있게도 만들었다. 또 대사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끄거나 증폭해 대사경로를 바꿔 아세톤은 덜 만들고 부탄올은 더 만들게 유도하기도 했다. 또 클로스트리디움속(屬)의 다른 종 박테리아를 대상으로 연구를 넓히기도 했다.
오늘날 대사공학 연구에서 가장 앞서가는 곳 가운데 하나가 카이스트 생명화학공학부 이상엽 교수팀으로 특히 바이오부탄올이 두드러진다. 이 교수팀과 GS칼텍스 연구팀이 공동으로 연구해 지난 2012년 학술지 ‘엠바이오’에 실은 논문은 발표된 지 4년이 채 안 된 현재 105회 인용됐을 정도로 획기적인 내용이다.
클로스트리디움 아세토부틸리쿰은 두 가지, 즉 직접 경로와 간접 경로로 부탄올을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연구자들은 이 메커니즘을 명쾌하게 규명했다. 그리고 더 많은 부탄올을 만드는 직접 경로의 비율이 높게 대사를 조작했다. 그 결과 간접 경로의 두 배였던 직접 경로가 18.8배가 됐다(물론 비율이므로 직접 경로가 는 것과 간접 경로가 준 게 반영된 결과다).
아무튼 전체적인 수율도 많이 늘어나 배양액 1L당 18.9ml의 부탄올이 만들어져 야생 균주에 비해 160%나 더 높았다. 투입한 포도당(먹이) 한 분자당 부탄올 0.71분자가 만들어져 역시 기존에 비해 245%나 더 높았다. 실제 연속배양 공정에 적용한 결과 배양액 1L에 시간당 1.32g의 부탄올을 얻었고 전환율도 포도당 한 분자당 부탄올 0.76분자였다.
지난달 29일 GS칼텍스는 여수에 세계 최초로 비식용 바이오매스를 쓰는 바이오부탄올 시범공장을 짓는 첫 삽을 떴다. 연간 생산량이 400t으로 공정의 상업화 가능성을 알아보는 게 주목적이다. 옥수수나 사탕수수 같은 식용(1세대) 바이오매스를 쓰는 바이오부탄올 공장은 있지만 폐목재나 볏짚 같은 비식용(2세대) 바이오매스를 이용하는 공장은 아직 없다.
1세대 바이오매스는 결국 식량 또는 사료를 전용하는 것이므로 세계 곡물시장을 불안하게 하는 원인으로 지목받고 있는데다 원료를 확보하려면 숲을 개간해 밭을 만들어야 하므로 전혀 친환경이 아니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따라서 최근 2세대 바이오매스를 이용한 바이오연료 연구가 활발하다.
연구자들은 비식용 바이오매스를 황산으로 처리해 셀룰로오스 등 고분자를 당으로 분해한 뒤 클로스트리디움 아세토부틸리쿰에게 먹여 부탄올을 만들게 했다. 이때 포도당뿐 아니라 여러 당이 나오는데 이를 다 잘 먹게 균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아마도 2012년 카이스트와 함께 만든 균주를 추가로 개량한 것으로 보인다.
이 회사의 홍보자료에 따르면 매년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폐목재가 300만t에 이른다고 한다. 부디 내년에 완공되는 시범공장이 잘 돌아가 상업성이 있는 것으로 결론이 나 우리나라가 2세대 바이오부탄올을 생산기지로 자리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