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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의 역사

lcs20230 2020. 3. 16. 13:29

“이게 정녕 딸기란 말이냐?”
“예. 전하.”
“어찌 이리 크고 탐스러운가. 도대체 이 딸기가 어디서 났느냐?”
“칠레에서 가져온 딸기의 꽃에 사향딸기 꽃가루를 묻혀 얻은 것이옵니다.”
“대단하구나. 앞으로도 딸기 연구에 매진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1764년 7월 6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접견실에서 루이 15세는 열일곱 살로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젊은 식물학자 앙투안느 니콜라 뒤셴(Antoine Nicholas Duchesne)이 가져온 딸기를 보고 깜짝 놀랐다. 평소 즐겨 먹던 숲딸기나 사향딸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기 때문이다.

왕의 칭찬에 힘을 얻은 뒤셴은 본격적으로 딸기 연구에 뛰어들었고 십수 년 전부터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 지역에서 자신이 만든 딸기만큼 크면서도 향이 더 뛰어난 딸기를 재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뒤셴은 이 딸기가 18세기 초 칠레서 들여온 딸기(자신이 쓴)와 16세기 북미에서 들여온 버지니아딸기를 교잡해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이 딸기에 ‘프라가리아 x 아나나싸(Fragaria x ananassa)’라는 학명을 붙여줬다. 학명 가운데 x는 잡종을 가리키고 ananassa는 파인애플을 뜻한다. 과일 생김새가 파인애플을 연상시킬 뿐 아니라 향도 이국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보다 한 세대 앞서 현대 분류학 체계를 만든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린네는 딸기에 프라가리아라는 예쁜 속명(屬名)을 지어줬다. Fragaria는 ‘달콤한 향기’를 뜻하는 라틴어 ‘fragrans’에서 만들었다. 당시 린네가 학명을 지어준 딸기는 유럽에 자생하는 숲딸기(F. vesca. 이하 속명을 약자(F.)로 표기한다)로 14세기 이래 재배되고 있었다. 산딸기만한 숲딸기는 작고 과육도 약했지만 향이 좋았다. 참고로 산딸기는 야생 딸기의 하나가 아니라 산딸기속(Rubus) 식물이다.

 

파인애플딸기가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하면서 숲딸기와 사향딸기는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우리가 즐겨 먹는 딸기가 세상에 나온 건 길어야 300년이고 본격적으로 재배된 건 250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20세기 들어 유전학 시대가 열리면서 많은 식물학자들이 딸기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딸기의 게놈이 무척 복잡하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딸기속(屬) 20여 종의 염색체 숫자가 제각각이어서 적게는 14개에서 많게는 70개까지 종잡을 수 없었다. 우리가 먹는 딸기는 56개였다. 이는 파인애플딸기가 8배체(8x=56)라는 말이고 최대 네 가지 2배체(2x=14) 딸기가 조상일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을 비롯해 대부분의 생물은 게놈이 2배체, 즉 염색체 한 쌍으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감수분열 과정에서 염색체가 분리되지 않아 2배체인 생식세포가 만들어지면 3배체 또는 4배체(양쪽 다 이런 경우) 게놈을 지닌 수정란이 생긴다. 이 경우 발생과정에서 동물은 대부분 죽지만 식물은 종종 살아남는다.

 

2011년 미국 노스텍사스대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공동연구자들은 숲딸기의 게놈을 해독해 학술지 ‘네이처 유전학’에 발표했다. 8배체인 파인애플딸기의 게놈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먼저 참조할 게놈으로 2배체 종들 가운데 딸기의 조상이 확실시되는 숲딸기를 선택한 것이다.

숲딸기의 게놈은 2억4000만 염기로 작지만(사람은 32억 염기다) 유전자는 3만4809개로 추정돼 전형적인 식물의 범위에 들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향기 분자를 만드는 데 관여하는 유전자로 밝혀졌다.

 

2014년 일본과 중국의 공동연구자들은 파인애플딸기의 게놈을 해독해 학술지 ‘DNA 연구’에 발표했다. 연구자들은 2배체 야생 딸기 네 종의 게놈도 해독해 앞서 숲딸기 게놈과 함께 비교했다. 그 결과 숲딸기의 직계조상과 함께 일본 고유종인 F. iinumae의 직계조상이 파인애플딸기 게놈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다만 8억 개가 넘는 염기에서 6억6000만 염기만 해독했고 품질도 좋지 않아 나머지 부분은 알아내지 못했다.

 

학술지 ‘네이처 유전학’ 3월호에는 딸기의 고품질 게놈을 해독해 그 기원을 밝힌 논문이 실렸다. 미시간주립대를 비롯한 미국의 공동연구자들은 최신 분석기술을 써서 딸기 게놈의 99%인 8억548만 염기를 해독했다. 그 결과 8배체 게놈에 기여한 2배체 네 종을 모두 밝혀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을 재구성하는 데도 성공했다.

 

수백만 년 전 동아시아에 자생하던 두 2배체인 F. iinumae(직계조상을 의미)와 흰땃딸기(F. nipponica) 사이에서 4배체 딸기가 나왔다. 아쉽게도 오늘날 이 4배체 딸기의 직계후손은 없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찾지 못했다. 참고로 흰땃딸기는 한반도와 일본에 분포하는 야생 딸기다. 

 

그 뒤 이 4배체 딸기가 유라시아에 자생하는 2배체 딸기인 F. viridis와 만나 6배체 자손인 사향딸기(F. moschata)가 나왔다. 6배체 딸기는 당시는 육지로 연결된 베링해를 건너 북미에 자생하는 숲딸기를 만났고 여기서 8배체 딸기가 나왔다. 이게 100만 년도 더 된 시절의 일이다.

숲딸기는 유라시아와 북미에 걸쳐 폭넓게 분포하는데, 지역에 따라 특성이 꽤 달라 네 개의 아종(subspecies. 약자로 ssp.)으로 분류한다. 2011년 게놈을 해독한 숲딸기는 유라시아에 자생하는 아종(F. vesca ssp. vesca)으로 일명 알프스딸기로 불린다. 

 

그런데 파인애플딸기 게놈을 정밀하게 분석해보니 이 아종의 직계조상이 아니라 북미에 자생하는 아종(F. vesca ssp. bracheata)의 직계조상이 게놈을 물려준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얘기지만 이 아종을 참조게놈으로 선택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늦어도 100만 년 전에 등장한 8배체 딸기는 이후 북미 동부에 자리 잡은 버지니아딸기(F. virginiana)와 남미에 진출한 칠레딸기(F. chiloensis)로 진화했다. 버지니아딸기는 향이 뛰어나고 칠레딸기는 과일이 크다. 그리고 수십만 년이 지나 유럽인이 아메리카에 진출하면서 각각 16세기와 18세기 유럽으로 가져갔고 18세기 초중반 프랑스에서 이들을 부모로 해서 둘의 장점을 물려받은 파인애플딸기(F. x ananassa)가 태어난 것이다. 

 

파인애플딸기가 한국에 소개된 건 100여 년 전이다. 작은 야생 딸기(흰땃딸기의 직계조상)가 수백만 년 전 시작한 여정이 수많은 세대를 거치며 지구를 한 바퀴 돌아 큼직한 재배 딸기가 돼 먼 조상의 고향으로 돌아온 셈이다. 

 

숲딸기 게놈이 우세

흥미롭게도 2배체 딸기 네 종의 게놈이 8배체인 파인애플딸기의 게놈에 동등하게 기여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가운데 마지막으로 합류한 북미 원산 숲딸기의 유전자가 다른 종들에 비해 20%쯤 더 많았다. 특히 과일의 향기와 맛, 색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지배했다.

 

주요 향기 분자인 제라닐아세테이트(geranyl acetate) 생합성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89%, 달콤한 과당 생합성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95%, 빨간색을 내는 안토시아닌 생합성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89%를 숲딸기 게놈이 맡았다.

 

루이 15세를 깜짝 놀라게 했던 큼직한 크기를 부여한 칠레딸기는 18세기 초 칠레에서 프랑스로 가져간 종이다. 이 딸기는 야생이 아니라 현지인들이 재배한 딸기로 보인다. 수백 년에 걸쳐 과일이 커지게 품종을 개량했다는 말이다. 남미에서는 유럽인이 들어오기 수백 년 전부터 흰딸기도 재배했다고 한다. 지난해 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에는 흰딸기 품종이 안토시아닌 색소를 합성하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긴 결과임을 밝힌 논문이 실렸다.


한참 딸기 얘기를 쓰다 보니 딸기가 듬뿍 올라간 생크림케이크와 진하게 내린 커피 한 잔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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